2008년 7월 25일 금연포럼(한양대학교)
나카무라 타이라(한양대학교 국제문화대학 일본언어문화학과)
이한정(李漢正)訳
도래하는 폭력에 관한 기억의 분유(分有)
대만 선주민족인 타이얄(Tayal)과 일본에 있어서 탈식민화의
민족지 기술
1. 대만, 대만의 선주민족, 타이얄에 대한 식민통치와 선주민족운동. 폭력에 관한 기억의
분유
2. 타이얄측에서 폭력에 관한 기억의 도래, 분유
3. 일본 측에서의 폭력에 관한 기억의 도래, 분유─저널리스트의 민족지 기술에 주목하여
4. 대만 선주민족과 일본의 양자에게 있어서의 탈식민화─기억에 의한
국가적/민족적이 아닌 「연대」와 일본의 대만 선주민족에 대한 식민지 통치책임의 의식화
1. 대만, 대만 선주민족, 타이얄에 대한 식민통치와 선주민족운동. 폭력에 관한 기억의 분유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을
가진 일본근대경제사의 연구자인 아버지의 영향(전공투, 전국공투회의와의 관계). 동경대공습(1945년 3월 10일 등)의 기억.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머리로는 싫어하는 것. 부친이 관리하는 집과
동경에 폐쇄감을 느끼고, 자신을 변화시켜줄 무언가를 예감하여 홋카이도로. 제국의 수도에서 우울한 일본인과 그것을 해방시켜줄 「식민지」. 살벌한 제국 수도의 인간관계가 잃어버린 것을 「프론티어」로 되돌리려는 「제국주의적 노스탤지어」(로살드, 1998).
홋카이도에서는 교육사회학을
전공하고, 대학생의 직업선택과 「살아가는 것」에 대한 졸업논문을 썼다. 아이누민족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면서도 그 계기를 만드는 일에는 진지하지 않았다. 등산과 스키를 좋아한다. 대학원 입시에서 맛본 정신적인 좌절로 부친이 권유하는 대로 대만에 유학하게 된다. 일본 자본주의의 발달사와 식민지문제에 관심이 있던 아버지는 거의 2년 가까이 대만에서 연구하고 있었다. 일본인이고 싶지 않은
생각과, 일본인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식민지와 전쟁책임에 대한 문제의식, 나무가 무성한 「남방(南方)」에 대한 동경이 교차한다.
1996년에 건너간 대만에서는 식민통치의 책임을 규탄 받을 것 같아서 몸을 사리고 있었지만, 「친일」파인 여러 대만인들의 보살핌과
사랑을 받고 일본과의 깊은 관계를 온 몸으로 실감한다. 일본을 위해서 전쟁터로
향한 남자들과 그 부인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보상이 지급되지 않았다는 것과 그들의 원통함을 피부로 느꼈다. 선주민족의 과거의 「자연과 하나가 되었던」 생활을 동경하고, 산지에 있는 촌락으로
가게 된다. 그러한 필드워크를 방법으로 하는 인류학부를 석사과정으로 선택한다. 중앙연구원 민족학연구소에서 방문학생으로 1년을 보낸 것을 포함해서 6년을 대만에서 지냈다.
대만 선주민족의 인류학적
연구와 함께 「일본」의 식민주의(colonialism)의 문제로서 양자에 관련한 역사와 문화를 깊게 고찰하고 싶어서 오키나와와 일본의 근현대사에
관해 연구하는 도미야마 이치로(富山一郎)씨가 있는 오사카대학 문학연구과(일본학연구실)의 박사과정에 입학함. 2007년 1월에 본고와 같은 제목으로 박사논문을 심사받았고, 2008년 3월부터 한양대학교에 부임했다.
폭력의 기억이라는 것
도미야마 이치로의 『증보판 전장의 기억』은, 오키나와전에 관한 기억을
말로 하는 가운데 말로써 폭력에 저항하는 가능성을 찾는 시도이다. 그것은 기억을 어떠한
정치적 자원으로서 이용하지 않은 시도이다. 「미래」와 「새로운 사회형태」(바트라 2002)와 함께 (그것들을 상상하는 가운데) 떠올려지는 기억에 주목한다. 근년에 역사학 등의 아카데미즘에서 「기억의 정치학」이라는 것이 이야기된다. 기억 그 자체가 정치가
아니며 또 기존의 정치역학의 응원단으로 동원된 자원으로서 정치가 되는 것도 아닌, 어떤 종류의 단언과
가정이 선행되면서도 새로운 사회형태가 구체적으로 창출되어 가는 그 (과정)가운데야말로, 기억의 정치라는 설정이
있다.(冨山 2006: 16). 기억을 말로 한다는 것이 어떠한 관계성을 생성시키는가하는 것이 문제이다. 기억을 말한다는 것이, 그것을 말하기 시작하는
그 장소에서 「우리들」의 생성과 겹쳐져야만
한다. 기억은 개인의 것도, 이미 상정된 집단의 것도 아닌 미래의 「우리들」과 관련을 맺는 것이다.(앞의 책: 266)
기억의 분유
도미야마가 말한 「우리들」은 어떤 주의에 의해서
뒷받침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분유되는 그 장소, 그 장소에서 솟아오르는 희미한 「우리들」이다. 그것은 공유된 역사를 지닌 국가/민족 속의 「우리들」과는 다르다.
오카(岡真理)의 『기억/이야기』는 사람이 주체적으로 지배하고 상기하는 것을 거부하는 폭력적, 트라우마적인 기억과 사건을 이야기함으로서 그것이 독자에게 분유되는 사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오노레 드 발작의 단편소설 「아듀」(1830년)는 귀부인인 스테파니가
전쟁 중에 입은 폭력의 경험을 경험으로서 재현할 수 없는, 표상 불가능한 <사건>으로 표현하고 있다.
스테파니의 원래 애인이던
필립대위는 생이별한 스테파니와 재회를 하게 되지만, 그 때 그녀는 폐인이
되었고 대위와의 기억은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자신과의 감미로운 기억을
스테파니가 되돌렸으면 해서 필립대위는 이별했던 해변가의 장면을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재현하고 스테파니를 그곳으로 데리고 간다. 그 순간 스테파니는 과거에 일어난 폭력적 경험을 모두 기억한 탓인지 그 자리에서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필립대위도 그녀의 뒤를 쫓아 자살한다.
소설 「아듀」는 폭력적인 사건을 「상세하게」라는 의미에서 보면 현실적으로는
재현되지 않는다. 역으로 폭력의 표상불가능성이 현실적으로 그려져 있으며 독자는
그 폭력,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폭력을 독자는 이해할 수 없고 「공유」하지도 못할 것이다. 「분유」라는 사태는 이때 주어지는
말이다. 「아듀」가 그린 폭력은 독자에게 희미하게 감지되고, 분유될 뿐이다. 여기에서는 사람의 무능함과 수동성이 두드러지고 능동적, 주체적으로 폭력을 이해하려는
측면은 배경으로 밀려나있다.
폭력의 묘사와 이야기를
보고 들은 사람들이 그 폭력의 전부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감지하는 것. 분유는 그러한 사태를
가리키지만 본고는 오카 마리의 논조를 쫓아 그러한 사태를 역으로 의식함으로서 식민지에 대한 통치책임을 깊은 차원에서 다루려고 한다.
식민지 통치책임과 기억의
분유─대만 선주민족과 일본의 관계에서
일본인이 여전히 식민지
통치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다는 인식이 필드워크에서 강해졌다. 그래서 식민지 통치책임을
지는 자세에 대해서 고찰하겠다. 제국일본의 식민지 통치책임은 일본과 일본인이 진다. 다카키 겐이치(高木健一)(2001)와 이타가키 류타(板垣竜太)(2005)가 지적하듯이 제2차 대전의 일본 패배와
미소 양 대국을 주축으로 하는 냉전체제는 일본의 식민통치․전쟁책임을 분명히 묻는 것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본고는 그 점을 직시한 상태에서 정부 간 교섭차원의 문제와 거리를
두고 필드에서 내가 보고 들은 이야기에서부터, 다시 말하면 근본적인
곳부터 이 문제를 생각한다.
가토 노리히로(加藤典洋)(1997)는 일본의 전쟁책임을
생각할 때 일본의 전사자에 대해서 먼저 애도를 표함으로서 일본인의 주체를 건전하게 확립한 다음에 아시아의 전사자와 피해자를 마주할 길이 열릴 것이라고
했다. 이 논리는 일본 내셔널리즘에 적합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근년의 내셔널리즘 연구는 식민통치와 전쟁책임을 물을 때에 거론되는 일본인이라는 국민주체를 비판한다. 그렇다면 국민주체(subject)는 무엇인가. 본고는 이 문제에 식민폭력의 기억의 「분유」에서, 책임을 지는 주어인 「우리들」이 어렴풋이 떠오른다고 주장한다. 책임주체를 거론하는
것이 내셔널리즘으로 연결되는 아포리아는 「주체」를 뒤흔드는 폭력의 기억의
분유라는 사태로 해결되지 않을까. 행위 또는 술어가 주어에 선행되는 사태에 주목하고 있다.
나카노 아사오(中野敏男)는 이것을 다른 말로
「실제로 응답하기 이전에 주체가 요구될 때, 그 자체로 인해 이미
응답으로 인한 반성과 자기변혁이 진행되는 것이 거부되고, 결국 실질적인 응답이
거부되어버린다」(中野 2001:307)고 말하고 있다.
본고는 대만에서 선주민족자치운동사의
맥락 가운데 식민지 통치책임을 고찰한다. 대만에서는 2001년부터 2008년까지 다섯 민족이
선주민족으로서 정부에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고 민족자치를 요구하고, 선주민족지식인은 「탈식민화」(decolonization)를 모색하는 현상이
있다 (中村, 2007).
대만을 지배하는 정권은
중화민국이다. 중국국민당(1991년 성립)이 세운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이 중국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하여 1949년에 대만으로 후퇴해서 중화민국은 대만대(臺灣大)의 정권이 되고 중국대륙에는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이 1949년에 성립되었다. 1971년에 국제연합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대표권을 인정하고 중화민국은 국제연합에서 탈퇴하였다. 일본과 미국은 1972년과 1979년에 연이어서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맺고, 대만과는 국교를 단절했다. 대한민국은 1992년에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맺고, 대만과 국교를 단절했다.
전 세계에서 고아가
된 마이너리티 「국가」 대만, 그 안에서 또 마이너리티가 된 것이 대만의 선주민족이다. 대만 인구 2300만 명 가운데 2%가 되지 않는 45만 명이 선주민족 인구이고, 14개의 민족을 공식적으로
정부가 인정하고 있다 선주민족을 한민족(漢民族)에서 완전히 독립한 민족주체로 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는 중국대륙에서
이주해 온 한민족과 선주민족은 대만에서 결혼해 피가 서로 섞여왔기 때문이다. 근대국민국가로서의 성격을
지닌 제국일본이 1895년부터 1945년까지 통치했던 대만에서는
국가에 의한 호적을 통해 인구를 파악한 것과 교육을 중심으로 한 각종 정책, 미디어의 영향 등으로
「한민족」과 「선주민족」이 다른 민족주체라는
인식이 퍼져갔다. 식민지정부는 선주민족의 거주지를 「진화」의 정도가 다르다는 이유로
법적으로 한민족과 구별하고, 산지에서 선주민족의 거주구의 대부분을 특별행정구역인 「번지(蕃地)」로 했다.
대만 선주민족은 근대국가에
의한 무력통합과 그 후의 동화정책에 순순히 따랐던 것은 아니다. 「이번5개년계획(理蕃五箇年計劃)」을 행한 일본과의 전쟁(1910-14년)이 시작되어 제국회의를
뒤흔든 1930년의 무샤(霧社)사건 등, 반란은 몇 번이나 발생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민중과 중화민국정부의 충돌로 발전한 1947년의 2,28사건 이후에 1950, 60년대와 백색테러라고 하는 국가테러리즘 시대를 지나온다(徐(編)2004). 이 가운데 타이얄과 트우 민족의 엘리트에는 「국가전복」을 도모하는 공산주의자의 죄명으로 죽은 자도 있고 그들의 명예회복은 1990년대까지 기다려야했다.
이상과 같이 폭력과
테러리즘의 시간을 지나서 1980년대부터 대만의 선주민족은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들은 자신들 이외에는 누구도 아니라며 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해
나갔다. 스스로 칭하기를 중국어로 <원주민족(原住民族)>이라고 하고, 1990년대부터 일련의 헌법개정과
독립된 행정기관의 설치를 달성하고 국유화된 민족 본래의 토지에 대한 반환운동을 일으켜 왔다(石垣 2007; 笠原 2004; 若林 2007). 2005년에는 「선주민족기본법」이 공포되고, 현재 「선주민족자치구법」 초안이 의논되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상과 같은 특이한 역사적 경위로 성립된 <원주민족>이라는 중국어를 일본어의 「원주민」이 주는 어감에 비추어 「선주민족」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본고는 대만의
고지에서 필드워크를 해왔던 일본인의 입장에서 일본인의 대만 선주민족에 대한 식민통치와 전쟁 책임을 고찰한다. 선주민족은 현재 정부에 14민족이 인정되고 본고는
필자가 사귀었던 다수의 타얄족 사람들을 중심으로 고찰한다. 일본의 식민통치와 전쟁책임은
선주민족운동의 배후에 있던 폭력의 기억을 「분유」하는 것부터 사고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폭력의 기억은 민족지에의 기술과 또 그것이 읽혀지는 것을 통해서
독자에게도 「분유」되는 것이다.
2. 타얄 측의 폭력에 관한 기억의 도래, 분유
수도 타이베이에서 차로 3-4시간 거리에 있는 에헨 촌락에 사는 우마오씨(60대전반 남성)의 집에서 머물면서 나는 대만에서 인류학의 필드워크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우마오씨는 일본의 식민지통치 시절에 대해서 「그때 자신들은 일본인의
이야기를 잘 들었어. 아침에 8시에 종이 울리면 일을
시작했어. 점심때 쉬고 5시에 일을 끝냈지」하며 애잔하게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했다.
우마오씨의 이야기는
일본의 식민통치의 좋고 나쁨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우마오씨의 조부세대에는 1910년에 일어난 일본과의 「전쟁」으로 죽은 사람들이 있었다. 일본 측은 그 싸움을
「가오간번 방면 액용선 전진(ガオガン蕃方面隘勇線前進)」이라고 한다(中村 2003a). 우마오씨의 일본 통치시절에
대한 평가에는 단순한 단언을 용납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우마오씨의 아버지는
에헨 촌락을 포함한 「가오간번」의 「진압평정」과 그에 이어서 전개되는
식민정책, 또한 제2차 대전시의 동원이라는
과정 가운데, 에헨의 타얄족들은 일본의 통치가 종료되는 1945년 까지 일본인의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는 (식민지)체제 속에 있었던 것이다.
일본과의 전쟁으로 입은
조부세대의 상처, 그리고 그 후의 식민통치라는 「근대화」의 전개, 일본이 떠난 후에도 계속된 국가통치의 폭력에 대한 경험이 우마오씨 이야기의 이면에 흐르고 있었다. 우마오씨의 이야기는 대만의 선주민족의 자치 추구 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국가 폭력을 수없이 당하면서도 대만의 선주민족은 「자신들」을 중국어의 「원주민족」이라고 부르고 국유화된 토지의 반환을 요구하고 자신들을 스스로가 다스린다는 자치를 요구하고 근년에는
그것을 어느 정도 실현시켰다.
그런데 본고에서는 이
선주민족 가운데 주로 타이얄에 초점을 맞추어서 폭력의 기억이 도래하는 여러 가지 상황을 보려고 한다. 첫 번째는 2000년에 성립된 타얄민족회의에서 거론된 민족사, 내셔널 ․ 히스토리이다. 타이얄의 민족회의는
민족고유의 영토에 대한 반환과 자치적 정부를 국가가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고, 그 근거를 300년 남짓한 피식민, 결국 식민화되어온 역사에서
구하고 있다(팸플릿).
두 번째는 타얄민족으로
호적이 되어 있는 고킨 소바이(高金素梅) 국회의원이 주장한 반제국주의사이다. 고킨 소바이는 야스쿠니신사에 대만의 선주민족의 조령합사(祖靈合祀)의 취소를 주장함과 고이즈미 전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대해 제소를 하며 그 근본원인으로서 일본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억압된 대만의 선주민족의 역사를 되돌릴 것을 주장하고, 그 발굴을 행하고 있다(팸플릿).
이러한 타얄 민족사
거론의 배경에 공통되는 것이 식민 폭력의 기억이다. 타얄민족회의의 현 의장인
마사 토피씨의 아버지는 토피 호라이고 유소년기에 인질과 다를 바 없는 일본의 교육을 받고 「이번(理蕃)」체제의 말단에 속하는 순사가
되었다. 식민 폭력의 한 가운데에는 일본의 교육제도가 놓여있었다(北村 2008). 그러나 일본당국이 고향이
있는 토지를 몰수하려고 한 것에 대해서 할복자살을 함으로서 항의하였다. 1939년 12월의 일이다. 아버지의 사건 당시에 7세 전후이던 마사 토피씨는 이 사실을 나에게 일본어로 말해주었고 더욱이 일본이 패전한 후에 중화민국정부가
행한 반강제적인 이주정책에 대해서도 증언했다.
아버지는 1920년부터 시험을 보아 경찰이 되었고 순사보를 몇 개월동안 했습니다. 1939년에 경찰을 그만두고 청년단장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의 토지에
측량기가 꽂혀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부가 하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아버지에게 상담했을 텐데,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1939년 12월 20일 각판산(角板山) 청년단의 검열이 있었습니다. 주의 장(州長), 경찰부장, 이번(理蕃)과장, 경시(警視) 등이 모두 왔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자네는 가게 몸이 안 좋으니까하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
갔습니다. 어머니가 각판산(角板山) 아래의 고개에 갔을 때 청년이 몇 십 명 내려왔습니다. 「저, 부인, 부인」하고 맞이해 주었다. 「원(原)씨 일입니다만, 매우 갑작스런 일이......」「전화가 왔는데,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유언 중에 논에 대해서는
확정적인 것은 없었지만 걱정될만한 일이 앞으로 일어나지 않도록 헷갈리지 않았으면 하고 써있었습니다. 우리들이 개발한 토지를
정부가 지주의 의사도 묻지 않고 맘대로 처분한다고. 나는 부락(촌락)의 사람들에게 면목이
없다. 처자식을 돌봐주게 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중화민국정부가 되고 나서)관음(도원현(桃園県) 해변 가에 있는 마을) 해안에 있는 토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2, 3년 정도 있다가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타이이타이병의 원인인
카드미움의 오염으로 모처럼 농사지은 벼에 카드미움이 스며들어서 먹을 수도 없고 팔 수도 없었습니다. 카드미움은 국가의 중요한
공업이었습니다. 논밭을 찾으라고 정부에서 38만 엔 정도를 받았습니다. 정부가 토지를 정리해서
매수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잖아요. 논밭을 찾은 사람은 괜찮았지만 모두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고킨 소바이 국회의원은
어머니가 타얄, 아버지가 대륙의 안휘성출신의 이른바 「외성인(外省人)」이다. 고킨 소바이씨는 2000년까지는 아버지의 신분인
한민족이었으나, 국회의원 입후보에 즈음해서는 선주민족의 신분을 취득했다. 선주민족의 신분을 취득할 때에 커다란 계기가 되었던 것이 이 팸플릿에도 실려 있는 어떤 사진이다(팸플릿과 사진참조). 그것은 1913년에 시카요우라는 대만북부에 있는 산지의 촌락부근에서 일본군경이 타얄족을 「토벌」할 때 복종하지 않는
타얄인을 참수하는 순간의 사진이다. 고킨 소바이씨는 이 사진을 보고 자신이 지닌 선주민족의 아이덴티티를
자각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함께 식민되어 온 타얄민족의 복원을 도모하는 타얄민족의회의 의장, 타얄민족에 입적된 국회의원 두 사람에게는 이러한 식민이 드러내는 폭력의 기억이 도래하고 있고 민족자치를
권하는 원동력의 배후에는 폭력의 기억이 존재하고 있다.
현재일본에서는 친일적인
대만과, 반일․혐일하는 한국과 중국이라는
매우 단순한 이항대립의 도식이 주류 미디어를 석권하고 있다. 그것은 제국일본이 저지른
짓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로 대표되는 역사수정주의의
대두(高橋 2001을 참조)와 궤도를 같이하는 것이다. 필자의 필드워크에도
「일본의 사람들에게, 산에 있는 사람들은
감사하고 있습니다라고 전해주십시오」라고 말하는 타얄 고령여성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머리말에 소개한 우마오씨의 장모로 그녀의 남편은 하급경찰관이었다. 전화로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에 그 피스이씨가 일본 통치시절이 기억이 났는지 매우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던 적이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우익에 의해 역사수정주의로 회수되어 버리기 일쑤지만
본고는 그 배후에 있는 폭력의 문제를 직시하겠다.
이러한 이야기의 한편에는
한민족 연구자가 조사한 타얄 고령자의 구전의 역사에는 일본의 전쟁보상에 대해서 「친일」적 담론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신랄한 평가가 담겨져 있다. 야유츠씨의 이야기(가명, 기록 당시 77세 여성, 두 사람의 남편이 일본을
위해서 전쟁터로 향한 다카사(高砂)의용대원이었다)를 소개하고자 한다.
야유츠씨는 「남편이 갔을 때가 23살이었습니다. 나는 24살, 좀 고통스러웠지만, 국가의 임무를 위해서
갔습니다」라고 했다. 군사저금, 전시보상에 관해서는
아래와 같이 이야기했다.
야유츠: 일본은 의용대 사람들이
남양에서 어느 정도 저금을 했는가를 조사했습니다. 아로크의 저금이 얼마였는지를
통지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받지 못했습니다. 속이고 있는지도 모르고. 게다가 그렇게나 적어서. 최근에야 겨우 조사하기 시작했지요. (중략) 많은 일본인이 관광하러 와서 여러 가지(보상금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말하지만, 나는 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신용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괜찮아 통장이 있다면 우리들이
줄께」하고 말하지만 그 후에는
아무것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중략) 일본의 교류협회가 조사해서, (중략) 저금을 확인하러 갔지만
거의 없어서 필요없다고 말했습니다. 제 아버지가 남양에 세 번이나 다녀와서 공을 세웠는데 그렇게
조금이라니 말이요. (괄호는 나카무라가 보충한 것임)
일본 대사관에 상당하는
교류협회의 조위금은 야유츠씨를 달래주지 못했다. 야유츠씨는 조위금을
받는 것을 거부했다. 다음은 야유츠씨와 아로크씨의 자식 노민씨가 필리핀에 갔을 때의
이야기이다.
야유츠: 노민이 두 살 때, 아버지가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나는 노민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러한 사람이었다고.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 ․ 이콘: A회사가 직원의 위로여행을 하고 노민도 A회사였기 때문에 필리핀에
가서 전쟁터였던 곳도 가 보았습니다. 많은 십자가가 있고 노민은 그것을 보고 무릎을 꿇고 아버지하고
외치며 울었습니다. 안내원이 이곳에서 대만병사가 많이 죽었습니다라고 설명했기 때문에
노민은 아버지를 기억했겠지요. 무릎을 꿇고 자신은 이제 대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중략)
질문자: 노민은 아버지의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까?
야유츠: 우리들 선주민은 사진
같은 것이 없습니다. 일본인은 사진이 있지요. 그런데 당신들은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왔습니까? 〔陳茂泰 (編) 2001:43-9〕.
전쟁터로 향한 다카사의용대원들은
아직까지 상처가 아물지 않은 것이 이해가 될 것이다. 제국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의 계획에 참여하고, 참여하게 된 사람들의 꿈은 부서져 버렸다. 야유츠씨 가족의 상처가
금방 치유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본고는 이러한 트라우마에 연관된 사건을 다룬 민족지의 기술이
야유츠씨 가족의 생각을 전달하고, 그렇게 전달받은 사람이 그것을 또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서
마음속에 소중하게 담아둠으로서 책임을 지는 일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일본인의 식민지통치와
전쟁책임에 대해 마주하는 자세로서 전중파 단체인 「아케보노카이(あけぼの会)」가 적극적으로 대만의
선주민족과 교류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중국대륙의 귀환자를
중심으로 한 「아케보노카이」는 전쟁 후에 결성되어
회원이 500명이 된다고 한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전다카사의용대원에
대해서 「대동아전쟁종군기장」과 「국화 문장(菊のご紋章)」이 들어간 금잔을 수여하여, 종군에 대한 「표창」을 했다. 또 쇼와천황의 동생인
미카사노미야(三笠宮)에게 전다카사의용대원들을
「알현」시키고, 그 노고를 위로했다. 아케보노카이의 활동은 천황제를 중심으로 한 식민통치 이래의 문화장치를 회상하며 향수하는 것으로 이용되고
있고 일본인의 전쟁 세대가 구 식민지인과 교류할 때 나타나는 하나의 전형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전다카사의용대원들도 「대동아전쟁」에서의 노고를 위로해주는
것으로서의 아케보노카이의 활동에 참여하여 어느 만큼의 위로를 받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3. 일본측에서의 폭력에 관한 기억의 도래, 분유─저너리스트의 민족지 기술에 주목해서
아케보노카이의 활동이
향수에 젖어 지난날을 그리워하는(nostalgic) 것은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일본민족학회」주최로 한 미야모토 노부토(宮本延人) 외 8명에 의한 「다카사(高砂)족 통치를 둘러싼 좌담회」(1954년)를 여기에서 보도록
하자. 대만의 식민지 통치를 담당한 일본인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이 보이기
때문이다. 전「이번과장(理蕃課長)」과 인류학자가 일본의
이번(理蕃)정책을 다른 서양 제국의
식민지 정책과 비교해서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타이베이 제국대학의
토속인종학(土俗人種學) 교실에서 배운 인류학자인
마부치 토이치(馬淵東一).「어쨌든 좋게 말하면 친절이고, 나쁘게 말하면 간섭에
지나지 않는 것이 대만의 이번(理蕃)정책에 대한 감상」이고, 정책은 초등교육을 열심히 하고 취학률을 올리기 위해서 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매우 소란스러웠지만 온정이」 있고, 특히 구미의 식민통치와
비교하면 「성적이 좋은 편이다」(앞의 책 : 190). 스즈키 히데오(鈴木秀夫, 전総督府理蕃課長)은 「나는 대만의 다카사(高砂)족은 살아 있는 천연기념물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아무리 애지중지할 풍속습관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무지한
채로 둘 수는 없다. 생활도 높은 교육도 받지 않으면 안 된다」(앞의 책 : 188). 패전 후 9년 뒤에 했던 좌담회는 이렇게 식민지 통치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끝맺고 있다. 이와 같은 심성이 21세기의 일본에도 남아있다.
그러나 이러한 향수에
젖어 있는(nostalgic) 심성의 소유와는 달리 많은 일본인 저널리스트가
식민의 폭력에 관한 기억에 대해서 듣고 그에 관해 쓰고 있다. 하야시 에다이(林えいだい)、柳本通彦、加藤邦彦、佐藤愛子、石橋孝 등이 있다. (식민통치에 대한 향수도 조금은 섞여 있는 저널리스트에 의해서 식민지의 경험이 어떻게 기술되고, 또 폭력의 기억이 분유되는가를 생각하고 싶다.
大田君江 ․ 中川静子 두 사람이 쓴 1969년의 『무샤(霧社)를 찾아가서』와 中川가 혼자서 쓴 1970년의 『일본제국주의 하의 대만 무샤(霧社)事件』은 무샤사건이라고 이름붙인 글이지만 자신의 「대만관의 만남」이라는 서두로 시작되어 자신이 서있는 위치를 강하게 의식하여 쓴 것이다. 「어려서 종전을 맞은 나」에는 전쟁의 책임은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2년에 처음으로 대만을 방문하고, 「나의 아버지는 태평양 전쟁 시에 일본군에게 종군해서 전사했습니다」 「일본이 통치하던 시절에 항일 운동을 했기 때문에 붙잡혀서 고문을 받고 그 상처가 아직도 몸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사람을 나는 알고 있다」라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여
「우리들은 일본이 저지른 죄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
무샤사건은 1930년에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해서 무샤부근의 세딕민족이 무장결기한 사건이다. 일본인 130여명이 살해되고 일본
측은 보복으로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고 세딕 측 사람의 천 명이상이 죽고 자살하고 행방불명이 되었다. 세딕민족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평지에 가까운 가와나카지마(川中島)로 이주, 수용되었고 많은 수가 자살하였다. 그리고 세딕민족은 십몇
년 후에 남양에서 「대동아전쟁」에 다카사(高砂)의용대로서 일본을 위해서
동원되며 스스로 지원했고 또는 지원하게 되었다. 다카사(高砂)의용대란 일본군이 비공식적으로
동원한 대만의 선주민족부대로 1941년 전후로 약 팔 천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다카사의용대의 지원에
대해서 「봉기하여 일어나서는 억압당하고, 다시 봉기하여 일어나지만 다시 억눌려서 결국 자신들의 저항이 쓸모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다카사족은 체제 안에서 사람들보다 더욱 열심히 일함으로서 자기의 존재를 강조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하는
인식에 다다른다.
무샤에서 직석으로 약15킬로에 있는 가와나카지마로 향한 나카가와(中川)일행은 세딕의 무장 결기시에 그곳 촌락의 소년이었던 高愛徳씨로부터 「잊을 수 없는 두 장면」을 들을 수 있었다.
「도망가는 일본인 경관이 자신을
공격해오는 상대가 친구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예전에는 함께 토벌에
나갔던 적도 있었을 겁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쏘지마, 쏘지마!』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그 친구가 친구이기 때문에 지금
너를 쏘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도 일본의 죄, 그래서 내가 너를 쏜다하며 울부짖고 이름을
부르며 『움직이지마! 한 발에 죽인다!』 하고 발사했다.」
「또 한 장면에서는 스승의
은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15살 정도의 공립학교 졸업생이었는데 자신이 겨눈 상대가 가지하라(梶原)선생님이란 것을 알고
아무래도 쏠 수 없어. 그러자 옆에 있던 나이 많은 자가 『왜 쏘지 않았나』하고 그를 때렸다. 그러자 그 아이는 『쏠 수 없어, 쏠 수 없어』하며 울면서 말했다고
했다.」
나카가와는 헤어질 때에
高愛徳씨에게 「우리들은 일본에 돌아가면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무샤사건에 대해서 전하겠다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高씨가 「당신들은 일본인」임을 강조하여, 「무샤로의 여행은 우리들에게
커다란 과제를 던져주었다」하며 말을 맺었다.
이상은 1970년의 글이지만 그로부터 30년 후의 2000년에 나카가와는 나카무라 후지에(中村ふじゑ)라는 이름으로 『오빈의 전언 : 타얄의 숲을 뒤흔든
대만 ․ 무샤사건』을 출판했다. 1978년에 무샤를 다시 방문하고 나서 사건에서 살아남은 오빈 타다오에게 자주 찾아가 사건 전후의
경과와 그 배경으로서의 일본식민지 지배의 폭력 다카사의용대와 전쟁동원의 경험, 선주민족위안부의 이야기
일본의 패전과 1947년의 2.28사건과 백색테러가 선주민족에게
준 영향, 일본인단체인「무샤카이(霧社会)」와의 교류 등을 보고 들으며 그것을 정리한 것이다. 나카무라(中村)는 어느사이엔가 오빈을
매해 찾게 되었고 오빈은 나카무라에게 그녀의 경험을 말할 때에 항상 「내 가슴은 단순하지 않아요, (중략) 마음이 타올라서 괴롭고
이야기하면 무서워」했다고 한다.
오빈은 무샤사건을 이야기하게
되고 1996년에 일본인 30명에게 이야기를 한
다음날 쓰러져서 수일 후에 죽었다. 나카무라는 이 책의 말미를 「쓰러질 때까지 계속 되어 온 어머니의 이야기를 이제는 내가 쓰자고, 나는 묘 앞에서 맹세했다」하며 맺었다. 오빈의 죽음을 보며 원고를 다 썼을 때 나카무라는 그녀 안에 있는 죽음을 깊게 실감하고 혼란스러워져서
바로 출판하지 못하고 우선 원고를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고 한다. 오빈과는 어머니와 자식
관계였던 나카무라의 깊은 심정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본서에 모아져 담긴
오빈과 그 주변의 사람들에 관해서 보고 들은 경험은 나카무라 후지에를 일본의 식민통치와 전쟁의 책임문제에 대한, 응답의 실천에 강하게 끌어들인다. 『말할 수 없었던 아시아의 전후 : 일본의 패전 ․ 아시아의 독립 ․ 배상』1991), 『사진도설 일본의 침략』(1992), 『아시아의 신문이 보도한
자위대의 해외파병과 미즈노(永野)발언 ․ 사쿠라이(櫻井)발언』(1995) 등의 서적의 분담 집필과
해외 논설의 번역을 1990년대에 계속해서 행한다. 2000년 전후부터는 「일본군 성노예제를 재판하는
여성국제전범법정」의 개최와 연결해서 대만의
선주민족「위안부」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관계한다. 대만의 「위안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에서도 가끔 학습회를 열고 뉴스레터에 글을 투고했다. 이와 같이 실천의 배후에는 수십 년에 걸쳐서 대만 ․ 무샤(霧社)주변의 사람들에 대해서
상세한 민족지의 기록처럼 보고 듣는 등의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4. 대만 선주민족과 일본 양자에게 있어서 탈식민화-기억에 의한 국가/민족이 아닌 「연락」과 일본의 대만 선주민족에 대한 식민통치책임의 의식화
본고가 주장하는 것은
이상과 같은 복잡하고 한 사람 한 사람 다른 피식민과 전쟁의 기억을 「반식민지주의」와 「반제국주의」로서만 듣는 것을 그만두자는 것이다. 동시에 피식민과 전쟁의
기억을 일본인의 자긍과 노스탈지를 회복하고 제국일본을 욕망하고 일본인 주체를 세우기 위해서 이용하는 것을 그만두자는 것이다. 역으로 이상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구체적으로 하나하나의 얼굴을 지닌 식민과 전쟁의 폭력에 관한 기억이
민족지와 같이 기술되고 읽히는 와중에 「분유」되어 가는 사태에 주목하려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분유」라는 것이 문제가 되지만
트라우마적인 기억, 폭력의 기억은 자기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다. 하물며 말로 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식민통치와 전쟁은 참으로
그러한 경험을 만들었지만, 그것을 후세의 사람들, 특히 가해자 측에 서있는 일본인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자기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는 폭력의 경험, 혹은 살해당해 죽은
사람의 경험은 이미 말로서 남길 사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한 전제에서 지금까지
이야기해 왔던 폭력의 편린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기술을 읽음으로서 독자는 그 사람들에게서 일어났던 폭력의 기억을 「분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대만 선주민족의
폭력을 분유한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카무라 후지에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필자가 나카무라와
같이 행동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나카무라도 그러한 것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만나게 된 폭력의 기억에서 얼굴을 돌리지 않고 그것을 무의식적이라도 분유해가는 과정이야말로
새로운 관계성이 태어날 중요한 계기가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주의주장이 맺어주는
연대보다도 폭력의 기억을 감지하는 이들의 조용한 연대가 생겨났을 것이다.
나는 우마오씨의 이야기를
폭력적인 과거를 바로 긍정 혹은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미래를 모색해가는 힘을
지닌 존재로 듣게 되었다. 일본의 통치를 받고 있던 「그 때 자신들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는 「자신들이 자신들의 일을 결정한다는」탈식민=자치 운동과 함께 열려간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하나의 국사, 즉 내셔널 히스토리에는 담을 수 없는 폭력에 관한 기억의 연쇄가
내셔널하지 않은 이음새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礒田和秀(2006)는 내셔널 히스토리가 각 개인의 사건을 제유법적으로 정리해서 체계적인 「하나의 역사」를 만드는 한편, 그것을 부수어서 한 쪽으로 비켜놓거나 하는 기억의 환유적 연쇄의 힘에 주목한다.
제유(synecdoche)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성을
갖는 것에 대해서 환유(metonymy)적인 관계성이란 어느 것과 어느 것의 「인접성」이 특색이다. 폭력의 기억은 민족회의와 고킨 소바이씨가 쓴 민족의 역사를 형성하는 요소가 됨과 동시에 분유됨으로
인해서 타얄과 일본이라는 민족주체의 두꺼운 껍질을 녹여서 무너뜨릴 수 있다. 그리고 분유의 중요한
계기는 먼저 「일본인이란 무엇인가」「무엇을 해왔는가」라는 물음에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폭력의 기억은 그와 같이 두텁게 몸치장을 하지 않아도 일상의
교류에서 문득 만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억압되어 온 민족의
역사와 주권의 부활을 도모해야하는 한편 여러 가지 형태로 만났던 폭력의 기억을 곧바로 정치적인 주장에 이용하지 않고, 그 폭력의 기억이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가를 반추함으로서 스스로가 분유한 기억을 말로 하여 타자와
서로 나누는 장을 만들어 가는 것이 탈식민화를 추진하고 식민통치의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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